그룹명/崇惠殿

文武王本紀

云石 2020. 5. 13. 15:57


文武王本紀

 

諱法敏太宗王太子母文明

妃慈儀王后金氏一作慈義波珍飡善品之女

辛酉元年(唐 龍朔 元年)唐帝命舉兵應伐高句麗王雖在服重違帝命七月以金庾信為

人將軍部分十三道總管王自領至始飴谷有告者曰百濟餘民據甕山城王先遣使

喩之不服王行次南川州鎮守劉仁願亦自泗北來會庾信進圍甕山城先燒大柵斬

殺數千人遂降論功隨品位或賜劍賜戟築熊峴城又率兵功百濟雨述城斬首一千

級助服波伽等與衆謀降賜爵及田宅衣服十月王聞唐使至國逐還京唐使弔慰兼

勅祭前王賜雜彩五百段庾信等休兵待後命劉德敏至傳勅旨輸平壤軍糧

二年正月王名庾信等九將軍以車二千餘輛載米四千石租二萬二千餘石赴平壤

二月庾信等至獐塞距平壤三萬六千步先遣步騎十五人赴唐營是日風雪寒沍人馬

多小凍死至楊隩致軍糧賜定方以銀三千七百分細布三十疋頭髮三十兩牛黃十九兩

定方得軍糧便罷還庾信聞唐兵歸亦還渡?川高句麗兵追之迴軍對戰斬首一萬

餘級虜小兄阿達兮等得兵械萬數論功中分本彼宮財貨田庄奴僕以賜庾信等耽

羅國(今濟州)來降

三月大赦命有司設大酺百濟殘賊屯聚内斯只城遣將軍金欽純等討破之

三年正月作長倉於南山新城築富山城

二月命欽純等攻取百濟居列城斬首七百餘級又攻居勿城沙平城降之又攻德安城斬首

一千七百級

五月百濟故將福信迎故王子扶餘豐立之圍留鎮郎將劉仁願於熊津城唐帝詔以劉仁軌

統前都督王文度之衆與我兵向百濟戰鬪陷陣所向無前福信等釋仁願圍既而福招

叛亡勢甚張王請唐益兵詔遣將軍孫仁帥率兵四十萬就熊府城王領庾信等二十八將

餘之合攻豆陵尹城周留城等諸城皆下之扶餘豐脫身走王子忠勝忠志等率其聚降

十一月我軍班師

四年正月令婦人亦服中國衣裳

按真德王三年始服中國衣裳今令婦人亦服中國衣裳王冕旒袞龍如中國之制

自太大角干至大阿飡衣紫阿飡至級飡衣緋幷牙笏大奈麻奈麻衣青自大舍至

先沮知衣黃衣有表衣半臂內衣自宰相至庶民皆着幞頭但庶人用鐵銅為帶麻

為履幞頭為布真骨大等帶用玉金次等用烏屏靴用皮但幞頭錦絹隨意耳真骨

宰相至五頭品皆乘車轎設褥垂幰屋舍真骨宰相長廣不得過二十四尺六頭品

二十一尺五頭品不過十八尺四頭品至庶人不過十五尺耳

二月命有司徒民諸陵園各二十戶百濟殘聚據泗沘城城叛熊州都督攻破之遣丘

日等二十八人如唐學樂

七月命將軍金仁問與府城兵馬攻高句麗突沙城滅之以一善居列二州民輸軍資於河西州

六年二月王欲滅高句麗請兵於唐

十月帝以李勣擊高句麗高句麗貴臣淵淨土以城十二戶七百六十三口三千五百四十三來投

七年七月大酺唐帝勅以智鏡愷元赴遠東又命劉仁願金仁泰從卑列道新羅

從多谷海谷二道會平壤伐高句麗李勣以新城為高句麗要海先攻之城人縛城主

開門降勣引兵進擊十六城皆下之王帥師次漢城州待李勣勣到平壤城移書來督

兵期王從之至獐塞聞勣歸乃還

十二月唐命劉仁願宣傳勅命助征高句麗仍賜王大將軍㫌節

八年正月李勣使劉仁問徵兵於新羅

二月李勣等拔高句麗扶餘城劉仁軌奉勅至王使金仁問備禮迎之約束訖王遂部分為二十八總管

劉仁願遣使告高句麗大谷漢城等二郡十二城歸服王遣人賀之

七月王帥師次漢城州遣諸將助唐伐高句麗

九月唐兵合我兵攻平壤城拔之高句麗王高藏降李勣執臧及王子福男德男大臣等二十餘萬口

迴唐高句麗亡

十月賜庾信為太大角干食邑五百戶賜與杖上殿不趨賜仁問大角干食邑五百户其餘將士論功有差

十一月王至國以高句麗所浮七千告祖廟曰祇承先志與大唐同舉義兵問罪魚百濟高句麗元凶服

罪國步斯靜敢用昭告遂賚死事者帛有差

九年二月赦教曰往者國家間於兩國北伐西侵暫無寧歲戰士暴骨積於原野先王愍百姓殘害越海

請兵本欲平定兩國雪累代之深耶全百姓殘命百濟雖平高句麗未滅寡人克承先志既平兩敵四隅静

泰臨陣立功幷已酬賞但念囹圄之苦未蒙更新之澤國內罪人無大小悉皆放出百姓飢寒糶人米穀者

待有年償之只還其母竆歉尤甚者子母俱免高句麗庶子安勝率其聚四千餘戶來降(一云安舜或曰

藏外孫)

十年六月高句麗大兄劍牟岑迎安勝為君遣小兄多式來告願作藩屏永世盡忠王命處之金馬渚

唐遣將討安勝安勝來奔

七月唐都督遣將覘我虛實王知其謀分遣諸將討百濟品日取六十三城天存取七城文頴取十二城

八月王册安勝為高句麗王

十一年正月靺鞨來圍舌口城將退出兵斬殺三百餘人唐兵來救百濟王遣將守甕浦又遣竹旨等

領兵踏加林城田禾遂與唐兵戰於石城斬五千三百級獲百濟將軍二人唐果懿六人

七月薛仁貴寄書數王王答書辨之

九月唐將高侃率蕃兵四萬到平壤侵帶方

十月遣將擊唐漕船七萬餘艘獲郎將甘耳大侯士卒百餘人其淪沒死者不可勝數

十二年正月王遣將攻百濟城克之

七月高侃率兵一萬李謹率兵三萬俱至平壤攻韓始馬邑二城克之進兵距白水城王遣將軍義福等

同高句麗兵逆擊斬首數千級築漢山州晝長城(周四千三百六十步)

九月王以向者百濟餘孽訴唐侵我事急未遑申奏出兵拒之唐怒納麗叛衆據濟故地以金仁問為王

遣劉仁軌來攻王遣級飡原川上表乞罪

十三年二月增築西兄山城

八月增築沙熟山城

九月築國原城北兄山城召文城耳山城首若州走壤城達舍郡主岑城居列州萬興寺山城歃良州

骨爭峴城唐兵與靺鞨契丹兵來侵北邊凡九戰我兵克之斬首二十餘級唐兵溺瓠瀘王逢三河

死者不可勝計

十四年正月始用新曆

八月大閱於西兄山下

九月封安勝為報德王閱兵靈妙寺前

十五年正月頒有司及州郡銅印劉仁軌破我兵於七重城引還唐以李謹行經略王遣使謝唐許之

改封仁問為臨海郡公王益取濟地遂抵麗境為州郡唐與契靺兵猶來侵王命出九軍逆戰謹行等

敗走緣安北河設關城又築鐵關城唐又與契靺來侵大小十八戰我軍皆勝

十六年唐兵又來攻大小二十二戰我軍皆克自是唐兵不至靺患亦息

十七年始置左司錄館高臧通靺謀叛扶餘隆畏羅不敢入舊國寄麗故地

十八年置北原小京

十九年發使略耽羅國重修宮闕剙造東宮始定諸宮門額號增築南山城

按宮有永明宮月池宮積板宮永昌宮大宮梁宮沙梁宮又有藪宮青淵宮夫泉宮且熱音宮屏村宮

北吐只宮弘峴宮葛川宮善坪宮伊同宮平立宮平立宮此皆離宮之散在他地非盡在王城也

正殿曰朝元殿内寢曰内黃殿又有崇禮殿講武殿平議殿臨海殿瑞蘭殿同禮殿又有鳴鶴樓月正堂

萬壽房月上樓望恩樓鼓月樓

宮門有臨海仁比武平玄德歸正遵禮的門庫門

城門一大井門二吐山良門三習比門四王后梯門又有犬首谷門(旣云始定諸宮門額號則宫殿門

號皆此時所定也然朝元平議內黃等殿則文武王前已有之遺事曰王御歸正門赦又安吉至歸正門

外以告則歸正乃最外之正門又曰歸正西門也關之西向可證也又有應門)

二十一年置右司錄館

七月一日王薨上諡文武神文王立以遺詔葬先王于東海口大石上又云屬纊之後十日便於庫門外庭依西國之式以火燒葬 (旣云葬東海大石上又曰於庫門外庭燒葬云意者以旣葬之柩何以燒之且石上斷無埋葬之理則此必作史者之有誤也見今於府東南四十里掛陵崇奉之立確有憑信或旣燒而後藏骨於此軟大石後稱大王岩本殿管理)

 

문무왕본기(文武王本紀)

이름은 법민(法敏)이니 태종왕(太宗王)의 태자(太子)요 어머니는 문명(文明)이다.

()는 자의왕후(慈儀王后) 金氏, 일설()에는 자의()라고도 했으니,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따님이다.

신유 (唐 龍朔元西紀六六一)에 당고종(唐高宗)이 분부를 내려 군사를들어 고구려

정벌(征伐)에 협조(協助)하게 하니 임금께서 비록 복제증(服制中)에 있으나 황제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 월에 김유신(金庾信)으로서 대장군을 삼고 부()十三道 총관(總管)으로

나누어 임금께서 몸소 거느리고 시이곡(始胎谷)에 이르렀다.

()하는 자의 말에 백제의 유민(遺民)이 옹산성(甕山城:회덕懷德)에 응거(雄據)했다

하였거늘 임금께서 먼저 사신을 보내어 효유(曉諭)했으나 항복하지 않으므로 임금께서

남천주(南川州)에 행차하니 진수(鎭守) 유인원(劉仁願)도 또한 사비성(泗泌城:부여)으로부터

와서 회합하였다.

유신(庾信)이 옹산성(甕山城)을 에워싸고 먼저 대책(大柵)을 불살라 數千명을 베인대

드디어 항복했으니 훈공(勳功)을 논()하고 품위(品位)에 따라 혹은 장검(長劍)

하사(下賜)하고 혹은 을 하사하였다.

웅현성(熊峴城:지금의 公州)을 건축했으며 또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우술성(雨述城:지금의

懷德)을 공격하여 一千餘級을 참수(斬首)하니, 조복(助服)과 파가(波伽)등이 여러 사람으로

더불어 모의(謀議)하여 항복하거늘 벼슬과 전택(田宅)과 의복을 하사하였다.

월에 임금께서 나라 사신이 신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서울로 돌아오니

나라 사신이 조상(弔喪) 하여 위문하고 겸하여 전왕에게 칙명(勅命)으로 치제(致祭)했으며

잡채(雜記) 五百段을 부조(賻助) 하였다.

유신(庾信) 등은 군사를 휴양시키고 뒤 명령을 기다리더니 유덕민(劉德敬)이 이르러

칙지(勅旨)를 전하고 평양(平壤)에 군량을 수송하게 하였다.

월에 임금께서 유신(庾信) 등 아홉 장군에게 분부를 내려 수레 여량(餘輛)

백미 四千石과 조() 二萬二千여석(餘石)을 실려 평양에 다다르게 하였다.

월에 유신 등이 장새(獐塞:지금의 遂安)에 이르러 평양에서 三萬六千步의 거리를 두고

먼저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十五人을 보내어 당나라 군영(軍營)에 다다르니 이날 풍설(風雪)과 추위가 심하여 인마(人馬)의 동사(凍死)가 많았다.

양오(楊隩)에 이르러 군량을 인도(引渡)하고 소정방에게 銀 三十七百分과 세포(細布) 三十필과

두발(頭髮) 三十兩과 우황(牛黃) 十九兩을 하사 하니 정방(定方)이 군량을 얻고 문득 돌아

가거늘 유신(庾信)이 당병(唐兵)의 철수함을 듣고 또한 돌아와 과천(?川)을 건넜다.

이에 고구려 군사가 추적해 오거늘 군사를 돌려 반격(反擊)하여 一萬여급(餘級)을 참수(斬首)

하고 소형(小兒) 아달혜(阿達兮) 등을 사로 잡았으며 병기(兵器) 萬餘點을 노획(鹵獲) 했으니, 논공(論功) 하는 가운데 본피궁(本彼宮)의 재물과 전장(田庄)과 노복(奴僕)을 나누어 유신(庾信)

등에게 하사하였다.

탐라국(耽羅國) (지금의 제주(濟州)이 와서 항복하였다.

월에 죄수를 크게 석방하고 유사에게 분부하여 큰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백제의 잔적(殘賊)이 내사지성(內斯只城:지금의 儒安)에 둔취하거늘 장군 김흠순(金欽純)등을

보내어 격파(擊破)하였다.

월에 남산의 신성(新城)에 장창(長倉)을 만들고 부산성(富山城:지금의 釜山)을 건축

하였다.

월에 흠순(欽純) 등을 시켜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지금의 거창)을 쳐서 취()하여

七百여급(餘級)을 참수(斬首)하였고 또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으며 또 덕안성(德安城)을 공격하여 一十七百을 참수(斬首)하였다.

월에 백제(百濟)의 옛 장수 복신(福信)이 옛 왕자(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이하여

임금을 삼고 유진낭장(留鎮郎將) 유인원(劉仁願)을 웅진성(熊津城)에서 에워싸게들 나라

황제(皇帝)가 조척(器物)을 내려 유인궤(劉仁軌)로서 전도독(前都督) 왕문도(王文度)의 군사를

통솔(統率)하게 하고 우리 군사와 더불어 백제로 향하여 도처(到處)에서 싸워 적진(敵陣)

함락하며 향()하는 바에 대적이 없으니복신(福信) 등이 유인원(劉仁願)의 에워싼 것을

풀고 달아났다.

이윽고 복신(福信)이 반란의 무리를 소집(召集)하여 형세(形勢)가 심히 떨치거늘 임금께서

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하니 장군 손인사(孫仁師)에게 조척(詔勅)을 내려 군사 四十萬名

이끌고 웅진성(熊津城)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임금께서 유신(原信) 二十八將을 거느리고 당병(唐兵)과 더불어 합공(合攻)하여 두릉 윤성

(豆陵:지금의 두양, 尹城:지금의 정산) 주류성(周的城:지금의 한산) 등 여러 성()을 모두

함락하니 부여풍(扶餘豊)은 몸을 탈출하여 달아나고 왕자 충승(忠勝) 충지(忠志)등은 그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十一월에 우리 군사가 모두 돌아왔다.

월에 부인으로 하여금 또한 중국의 의상(衣裳)을 착용(着用)하게 하였다.

상고하건데 진덕왕(眞德王) 년에 비로소 중국의 의상(衣裳)을 착용(着用)하게 하였고

이제 부인(婦人)들도 또한 중국(中國)의 의상(衣裳)을 입게 하였다.

임금의 면류관(冕旒冠)과 곤룡포(袞龍袍)는 중국(中國)의 제도와 같고 태대각간(太大角干)

으로부터 대아찬(大阿飡)에 이르기까지는 자의(紫衣)를 입으며 아찬(阿飡)으로부터

급찬(級飡)에 이르기까지는 비단옷을 입는데 모두 아홀(牙笏)을 사용한다.

대내마(大奈麻)와 내마(奈麻)는 청의(靑衣)를 입고 대사(大舍)로부터 선저지(先坦知)

이르기까지는 황의(黃衣)를 입는데 표의(表衣)와 반비내의(半臂內衣)가 있으며,

재상(宰相)으로부터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복두(幞頭)를 착용한다.

다만 서인(庶人)은 동철(銅鐵)로서 띠()를 삼고 삼()으로서 신()을 만들며

면포(綿布)로서 복두(幞頭)를 마련한다.

진골(眞骨)의 대등(大等)으로서 띠()를 만들고 차등(次等)은 오서각(烏犀角)

으로서 띠를 만들며 신()은 가죽을 사용하고 다만 복두(幞頭)이나 으로서

임의(任意)로 만든다.

진골 재상(眞骨宰相)으로부터 오두품(五頭品)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수레와 교자(轎子:가마)

타는데 요()를 깔고 앙장(仰帳)을 드리을 수 있다.

옥사(屋舍)에 이르러서는 진골 재상(眞骨宰相)은 장광(長廣)二十四尺을 지날 수 없고

육두품(六頭品)二十一尺을 지날 수 없으며 오두품(五頭品)十八尺을 지날 수 없고

사두품(四頭品)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는 十五尺을 지날 수 없다.

월에 유사에게 분부를 내려 백성을 옮기는데 여러 능원(陵園)은 각二十戶로 결정하였다.

백제의 잔민(殘民)들이 사비산성(泗沘山城)에 의거(依據)하여 반란(叛亂)을 일으키거늘

웅주도독(熊州都督)이 이를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구일(丘日) 二十八人을 각나라에 보내어 악()을 배우게 하였다.

월에 장군 김인문(金仁問)에게 분부를 내려 부성(府城)의 병마와 더불어 고구려 돌사성

(突沙城)을 공격하여 이를 섬멸(殲滅)하고 일선(一善:지금의 선산)과 거열(居列:지금의 거창)

두 고을 백성을 시켜 군수품(軍需品)을 하서주(河西州:지금의 강릉)로 수송하게 되었다.

월에 임금께서 고구려를 섬멸하고자 하여 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하였다.

월에 당고종이 이적(李勣)을 시켜 고구려를 공격하니, 고구려의 중신(重臣) 연정토(淵淨土)

十二城 七百六十三戶 三千五百四十三口를 이끌고 투항(投降)하였다.

월에 큰 잔치를 베풀었다.

당고종이 지경(智鏡) 개원(愷元)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요동(遼東)에 다다르게 하고 또

유인원(劉仁願) 김인태(金仁泰)에게 분부하여 비열도(卑列道:지금의 안변)로 쫓아 나아가게

했으며, 신라는 다곡(多谷)과 해곡(海谷) 두 갈래 길로 쫓아 평양(平壤)에 회합하여 고구려를

정벌(征伐)하기로 했다.

이적(李勣)이 신성(新城)으로서 고구려의 요해지(要活地)라 하여 먼저 공격하니 성중(城中)

백성들이 성주(城主)를 결박(結縛)하여 성문(城門)을 열고 항복했으며 이적(李勣)이 군사를

이끌고 진격(進擊)하니 十六城이 모두 항복하였다.

임금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한성주(漢城州)에 행차하여 이적(李勣)을 기다리더니 이적(李勣)

평양에 이르러 서찰(書札)로서 군사의 기약(期約)을 독촉하거늘 임금께서 이를 쫓아

장새(獐墓:수안)에 당도하여 이적(李勣)의 철거(撤去)함을 듣고 이에 돌아왔다.

十二월에 나라에서 유인원(劉仁願)에게 분부를 내려 칙명勅命)을 전달하여 고구려

정벌(征伐)에 협조하라 하고 인하여 임금에게 대장군의 정절(㫌節)을 내렸다.

월에 이적(李勣)이 유인문(劉仁問)을 시켜신라에 군사의 징발(徵發)을 요청하였다.

월에 이적(李勣)등이 고구려의 부여성(扶餘城)을 함락(陷落)시켰다.

유인궤(劉仁軌)가 칙서(勅書)를 받들고 오거늘 임금께서 김인문(金仁問)으로 하여금

예절(禮節)을 갖추어 영접(迎接)하고 약속(約束)을 맺은 후에 임금께서 드디어 부()

나누어 二十八 총관(摠管)을 삼았다.

유인원(劉仁願)이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대곡(大谷) 한성(漢城) 二部 十二城

귀복(歸服) 함을 고()하니, 임금께서 사람을 보내어 하례(賀禮)하였다.

월에 임금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한성주(漢城州)에 행차했으며 여러 장수(將帥)를 보내어

나라를 도와 고구려를 정벌(征伐)하였다.

월에 나라 군사가 우리 군사와 연합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쳐서 함락(陷落)하매

고구려왕 고장(高臧)이 항복하거늘 이적(李勣)이 고장(高臧)및 왕자 복남(福男) 덕남(德男)

대신 등 二十餘萬名을 데리고 나라로 돌아가니,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월에 유신(庾信)으로서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삼았고 식읍(食邑) 五百戶를 하사(下賜)

했으며 여(輿)와 장()을 내려주었고 궁전(宮殿)에 올라도 추창(趨蹌) 하지 않게 하였다.

인문(仁問)은 대각간(大角干)을 삼았고 식읍(食邑) 五百戶를 하사(下賜)했으며 그 나머지

장사(將士)들은 훈공(勳功)하는데 차등이 있었다.

十一월에 임금께서 환국하여 고구려의 부로(俘虜) 七千名으로서 조묘(神廟)에 고()

하기를, “삼가 선조의 뜻을 받들어 나라와 함께 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에

죄를 물으니 원흉(元兇)이 죄를 자복(官服)하여 국사가 안정(安靜)되었기에 감히

()하옵니다“. 하고 드디어 왕사에 죽은 자들에게 비단을 주되 차등이 있었다.

월에 죄수를 크게 석방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옛날에 우리 나라가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 북쪽에서

공격해오고 서쪽에서 침범하여 잠시도 편안한 해가 없었고 전몰장병(戰及將兵)의 뼈가

벌판에 흩어져 있었다. 선왕께서 백성의 잔해(殘害) 입음을 불쌍히 여기사 바다를 건너

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한 것은 원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여러 세대의 수치(差耻)

씻고 백성의 잔명(殘命)을 보전(保全)하고자 함이었는데 백제는 비록 평정했으나

고구려는 섬멸(殲滅) 하지 못했다. 내가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이미 두 적국을 평정하여

四方이 안정(安靜)하였고 진영(陣營)하여 훈공(勳功)을 세운 자도 모두 상전(賞典)

베풀었다.

다만 생각컨데 감옥(監獄)에서 고생하는 죄수(罪囚)들은 갱신(更新)의 은택(恩澤)을 입지

못했으니 나라 가운데 죄수들은 죄의 경중을 물론하고 모두 석방할 것이며, 빈한(貧寒)

백성들이 남의 곡식을 대여(貸與)받은 자는 풍년을 기다려 상환(償還)하되 다만 본액

(本額)만을 돌려주고 극빈자(極貧者)는 본리(本利)를 모두 탕감(湯減)하게 하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서자(庶子) 안승(安勝)(一說에는 안순(安婦)이라 하였고 혹은 고장(高臧)

외손(外孫)이라고도 하였음.)이 그 무리 四千 餘戶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다.

년 월에 고구려의 대형(大兄) 검모잠(劍牟岑)이 안승(安勝)을 맞아 임금을 삼고

소형(小兒) 다식(多式)을 보내어 고()하기를, “원컨데 번병(藩屛)이 되어 영세(永世)도록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하니임금께서 문부를 내려 금마저(金馬渚:익산)에 거주하게 하였는데,

나라에서 장병을 보내어 안승(安勝)을 토벌(討伐)하매 安勝이 패()하여 달려왔다.

월에 나라 도독(都督)이 장수(將帥)를 보내어 우리 허실(虛實)을 엿보거늘 임금께서

그 꾀를 알고 여러 장수(將帥)를 나누어 보내어 백제를 토벌(討伐)했으니. 품일(品日)

六十三城하고 천존(天存)七城했으며 문영(文穎)十二城하였다.

월에 임금께서 안승(安勝)을 책봉(冊封) 하여 고구려의 왕을 삼았다.

十一월에 말갈(靺鞨)이 설구성(舌口城)을 에워쌌다가 장차 물러갈 즈음에 군사를

출동시켜 三百餘人을 베어 즉였다.

나라 군사가 와서 백제를 구원하거늘 임금께서 장수(將帥)를 보내어 옹포(甕浦)를 지켰고

또 죽지(竹旨) 등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가림성(加林城)의 답곡(畓谷)을 밟아 버리고

드디어 나라 군사와 더불어 석성(石城)에서 싸워 五千三百을 참수(斬首)했으며 백제의

장군 二人나라 과의(果懿) 六人을 사로잡았다.

월에 설인귀(薛仁貴)가 서찰(書札)을 보내어 왕의 허물을 물거늘 임금께서 답서를 보내어

변명(辨明)하였다.

월에 나라 장수(將帥) 고간(高侃)이 번병(蕃兵) 四萬名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대방(帶方)을 침범하였다.

월에 장수(將帥)를 보내어 나라 조선(漕船:양식을 나르는 배) 七萬餘長을 공격하여

낭장(郎將) 감이(甘耳) 대후(大侯)와 사졸(士容) 百餘人을 사로잡았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이루 셀 수도 없었다.

十二월에 임금께서 장수(將帥)를 보내어 백제의 성()을 공격하여 이겼다.

월에 고간(高侃)은 군사 一萬名을 거느렸으며 이근(李謹)은 군사 三萬名을 거느리고

모두 평양에 이르러 한시(韓始:평양부근)와 마읍(馬邑:평양 근처) ()을 공격하여

이기고 군사를 전진(前進) 시켜 백수성(白水城:백천)에 이르렀거늘 임금께서 장군 의복(義福)

등을 보내어 고구려 군사와 함께 반격(反擊)하여 數千級을 참수(斬首)하였다.

그리고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 (周圍四千三百六十步)을 쌓았다.

월에 임금께서 전자에 백제의 유민(遺民)들이 나라에 호소(呼訴)하여 우리를 침범하려

하므로 일이 급박(急迫) 하여 미처 주달(奏達) 할 겨를이 없이 군사를 보내어 막으니

나라에서 노여워하여 고구려의 반민(叛氏)을 받아들여 백제의 옛땅에 웅거(雄據)하여

김인문(金仁問) 으로서 왕을 삼고 유인궤(劉仁軌)를 보내어 공격해 오거늘 임금께서

급찬(級飡) 원전(原川)을 보내어 글을 올려 사죄하였다.

十三월에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증축하였고 월에 사숙산성(沙熟山城:청풍)

증축했으며 월에 국원성(國原城:忠州古薍長城)과 북형산성(北兄山城)과 소문성

(召文城:義城)과 이산성(耳山城:高靈)과 수약주(首若州:春川)의 주양성(走壤城)

달사군(達舍郡)의 주잠성(主岑城)과 거열주(居列州:居昌)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梁山)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

나라 군사가 말갈(靺鞨)과 글란(契丹)군사와 더불어 북쪽 변방(邊方)에 침범해 오거늘

무릇 아홉 번 싸워 우리 군사가 이기고 二十餘級을 참수(斬首)했으니 나라 군사가

호노(瓠瀘:臨津江下流)와 왕봉(王逢)의 두 강()에서 빠져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十四월에 비로소 신력(新曆)을 사용하였다.

월에 서형산(西兄山) 아래에서 크게 군병(軍兵)을 사열하였다.

월에 안승(安勝)을 봉()하여 보덕왕(報德王)을 삼았고 영묘사(靈妙寺)앞에서 군병을

사열하였다.

十五월에 유사와 주군(州郡)에 동인(銅印)을 반포하였다. 유인궤(劉仁軌)가 우리

군병을 칠중성(七重城)에서 파한 다음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는데 나라에서 이근행(李善行)

으로서 경락(經略)하게 하므로 임금께서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니 나라에서 용서하고

仁問을 고쳐 봉()하여 임해군공(臨海郡公)을 삼았다.

임금께서 백제의 땅을 거의 모두 차지하고 드디어 고구려의경계선(境界線)에 이르기까지

주군(州郡)을 삼았다. 나라가 군사가 글란(契丹) 말갈(靺鞨)의 군사와 더불어 오히려

침범해 오므로 임금께서 구군(九軍)을 보내어 반격(反擊)하니 근행(謹行)등이 패()하여

달아나거늘 안북하(安北河)의 연변(沿邊)에 관방(關防)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鐵關城)

쌓았다. 나라가 또 글란(契丹)과 말갈(靺鞨)로 더불어 침범해 오거늘 대소(大小) 十八番

싸음에 우리 군사가 모두 이겼다.

十六년에 나라 군사가 또 공격해 들어와 대소(大小)二十二番의 싸움에 우리 군사가

모두 이기니 이로부터 나라 군사가 침범해 오지 않고 말갈(靺鞨)의 환난(患難)

또한 그쳤다.

十七년에 비로소 좌사록관(左司錄館)을 설치하였다. 고장(高臧)이 말갈(靺鞨)을 내통(內通)

하여 반란(坂亂)을 일으키거늘 부여융(扶餘隆)이 신라를 두려워하여 감히 고국에 들어

가지 못하고 고구려의 옛땅에 머물러 있었다.

十八년에 북원(北原)에 작은 서울을 설치하였다.

十九년에 사신을 보내어 탐라국(耽羅國)경락(經略)하였다.

궁궐(宮闕)을 증수하고 동궁(東宮)을 창조(刱造)했으며 비로소 여러 궁문(安門)

액호(額號)하였고 남산성(南山城)을 증축하였다.

- ()

경락(經略) : 전국(全局)을 포섭(包攝)하여 다스리는 것.

동궁(東宮) : 태자(太子)나 세자(世子)가 거처(居處)하는 곳.

 

상고하건데 궁궐은 영명궁(永明宮) 월지궁(月池宮) 적판궁(積板宮) 영창궁(永昌宮)

대궁(大宮) 양궁(梁宮) 사량궁(沙梁宮)이 있고 또 수궁(藪宮) 청연궁(淸淵宮) 부천궁(夫泉宮)

차열음궁(目熱音宮) 병촌궁(屏村宮) 북토지당(北吐只宮) 홍현궁(弘峴宮) 갈천궁(葛川宮)

선평궁(善坪宮) 이동궁(伊同宮) 평립궁(平立宮)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이궁(離宮)

각처(各處)에 흩어져 있는 것이요모두 왕성(王城) 안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전(正殿)은 조원전(朝元殿)이라 이르고 내침(內寢)은 내황전(內黃殿)이라 이르며

또 승례전(崇禮殿) 강무전(講武殿) 평의전(平議殿) 임해전(臨海殿) 서란전(瑞蘭殿)

동례전(同禮殿)이 있었고 또 명학루(鳴鶴樓) 월정당(月正堂) 만수방(萬壽房) 월상루(月上樓)

망은루(望恩樓) 고월루(鼓月樓)가 있었다.

궁문(宮門)은 임해(臨海) 인비(仁比) 부평(武平) 현덕(玄德) 귀정(歸正) 준례(遵禮)와 적문(的門) 고문(庫門)이 있었다.

성문(城門)은 대정문(大井門)이요 는 토산양문(吐山良門)이며 은 습비문(習比門)이요

는 왕후제문(王后梯門)이며 또 견수곡문(犬首谷門)이 있었다.

 

(이미 이르기를, “비로소 여러 궁문(宮門)의 액호(額號)했다”. 고 했은즉 궁전(宮殿)

문호(門號)는 모두 이때에 한 것이다.

그러나 조원(朝元) 평의(平議) 내황(內黃) 등의 궁전(宮殿)은 문무왕(文武王) 이전에 이미

있었다.

유사(遺事)에 이르기를, 임금이 귀정문(歸正門)에 납시어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고

하였고, 또 안길(安吉)이 귀정문(歸正門) 밖에 이르러 고()했다고 했은즉 귀정문(歸正門)

가장 밖에 있는 정문(正門)이다.

또 이르기를, 귀정(歸正)은 서문(西門)이라고 했으니, 궁궐(宮闕)의 서향(西向)을 고증()

수 있는 일이요, 또 응문(應門)이 있었다.)

 

二十一년에 우사록관(右司錄館)을 설치하였다.

일에 임금이 훙하거늘 시호를 문무(文武)로 올리고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했으며

유조(遺詔)에 의하여 선왕을 동해의 어귀 큰 바위 위에 장례(葬禮)를 하였다.

또 이르기를, “숨을 거둔 후 十日에 문득 고문(庫門)의 외정(外庭)에서서역국(西域國)

예식에 의하여 화장했다.“고 하였다.

 

(이미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를 하고 또 이르기를, 고문(庫門)의 외정(外處)에서

화장했다고 했으니 생각컨데 이미 장사를 한 영수(靈柩)를 어떻게 불사르겠는가?

또 바위 위에 매장(埋葬)할 이치(理致)도 없은즉 이는 반드시 사기(史記)를 지은 자의

착오(錯誤)인 듯하다.

지금 경주부(慶州府) 동남방(東南方一四十里 괘릉(掛陵)에 모신 자취가 확적히

신빙성(信憑性)이 있으니, 혹시 화장한 후에 유골(遺骨)을 이곳에 모신 것이 아니겠는가?

큰 바위는 후세에 대왕암(大王巖)이라 일컫고 본전에서 관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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