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崇惠殿

發刊辭

云石 2019. 10. 30. 02:20



發刊辭



人類가 文化를 創造함에 國家에는 史記를 纂述하여 爲政者의 善惡을 立證케하여 國基를
굳건히 하는데 意義가 크다고 볼 수 있으며, 氏族에는 族譜를 編纂하여 先祖의 根源과
子孫의 昭穆을 明瞭하게 하여 後孫으로 하여금 自身의 系統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이와 같이 崇慧殿誌 또한 新羅千年의 歷史인 同時에 汎新羅金氏資源譜로써 秘藏의
大文獻이라 아니할 수 없다.


壬申年(一九三二)에 刊行된 殿誌가 있으나 純漢文으로 表記되어 있어 一般知識人도
解得이 어려움으로 이를 안타깝게 여져 丁卯年(一九八七)에 國譯本으로 第二輯을
發刊하면서 未登載된 殿陵守護事實을 追錄하여 出刊한 바있다.
回顧컨대 우리 崇惠殿은 先王이신 敬順王께서 高麗에 護國後 新羅遺民들이 大王께서
百姓에게 베푸신 德義를 思慕하여 慶州 月城에 祠堂을 지어 影幀을 모시고 每 名節에
祭享을 奉行하였다。


不幸하게도 壬亂때 祠宇가 燒失되어 그 後부터는 位牌로써 祭享을 받들었다.
天啓七年丁卯(一六二七)에 이르러 東泉村에 祠堂을 重建하고 叅奉一人을 두어 祭享을
받들게 하였는데(叅奉은 禮曹에서 差出) 祭奠費는 官에서 擔當하여 籩豆는 各 七器로
限定하였다. 그 후 九十七年째 되는 景宗三年癸卯(一七二三)에 敬順王殿이라는 殿號를
宣額받고 科米一定數量과 儒生, 守護軍, 殿卒등을 두었다.

正祖十六年壬子(一七九二)에 正殿 後面에 沙汰가 발생하는 患亂입을 입어 그 二年後인
甲寅年(一七九四)에 現在의 位置인 皇南里로 移建하여 敬順王을 獨享하다가 高宗
二十四年丁亥(一八八七)에 味鄒王 位牌를 奉安하였고 그 이듬해 戊子年(一八八八)에
文武王 位牌를 奉安하게하고 殿號를 崇惠殿으로 宣領을 내렸으며, 入籩入豆를 갖추어
三王의 祭享을 받들게 하였다。


丙寅年(一九二六)에 味鄒王陵(竹現陵)에 叅奉을 差出하고 釋菜禮를 갖추어 祭享을
받들게 하였다.
五辰年(一八九二) 五月에 崇惠殿金氏花樹稧를 創立하여 先王殿陵 香火奉行時 財源을
마련하였다.
癸卯年(一大六三)에 社團法人新羅崇惠殿陵保存會을 創設하여 殿陵保存守護에 誠力을
倍加하였다.
第三輯은 第一、二輯 文獻 그대로하고 漏落된 部分과 새로운 事實을 登載하여
口傳으로 傳承하며 傳授過程에서 訛傳이 생길 수 있으나 文獻은 根據爲主이라 대단히
重要하다 할 수 있다.
歷史는 그 나라의 龜鑑이며 人生의 指標일진대 歷史는 어디까지나 事實대로 敍述되어야
하며 또 事實대로 把握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빠진 史料를 補充하고 잘못 記述한 部分을 修正하여 史學者나 良識있는
國民으로 하여금 올바른 史料에 接近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觀點에서
殿誌에 關한 資料의 補充整備는 新羅史學의 硏任이라 할 것이다.
考證없는 資料들은 一切 登載치 않으며 新羅三殿의 殿誌를 綜合하며 新羅의 歷史와
文化가 繼承發展한 學術誌로 지금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第二輯 刊行後 三十年되는 丙申年(二○一六)에 殿陵守護의 새로운 事實과 漏落된 資料
等의 補完이 切實하여 殿誌編纂委員을 構成하여 數次 會議를 하여 結論은 第三輯을
刊行키로 決定하였다.



第三輯은 名實相符한 新羅金氏 三十八王의 偉業과 聖歷을 闡揚하여 崇慕하며 叅奉을
差出하여 享祀를 奉行하여 온지 四百餘年의 固有傳統儀禮를 繼承하는 王子王孫의
矜持와 自矜心으로 宗祖睦族의 指針인 文獻이 되기를 祈願합니다.
끝으로 殿試發刊에 賢勞하신 編纂委員 諸賢 感謝드리며, 特히 發刊推進 初期 副委員長으로
애써 주신 錫球 前崇惠殿叅奉님과 뒤를 이어서 殿叅奉으로 到任하여 發刊業務에 많은 手苦를

해주신 象壽 崇惠殿叅奉님께 甚深한 感謝의 말씀을 드립니다.





大輔公誕降一九五三年戊戌(二○一八年) 十月 日
社團法人新羅崇惠殿陵保存會理事長
崇惠殿誌編纂委員會 委員長 金瑢焕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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