雞林金氏始祖誕降遺墟碑銘 并序
新羅無史非無史也由世之人不讀也新羅傳朴昔金三姓立國為千年雞林即閼
智誕生之地今屬嶺南之慶州府世之以金為氏者皆以閼智為始祖東人至今傳其
地而至其世次沿革之載於史者或未詳焉今因其銘碑略識之初脱解時聞始林雞
鳴得金櫝開而視之有小兒在王乃收養之名曰閼智賜姓金氏更名其林曰雞林閼
智七世孫味鄒娶助賁王女王無子味鄒遂代立號為尼師今自味鄒歷奈勿實聖至
訥祇是為麻立干教民服牛車訥秘薨子慈悲立慈悲薨子焰智立始開市肆以通四
方之貨昭智薨子智證立禁人殉葬命州郡勸農始用牛耕定國號曰新羅改方語尼
師今麻立干稱王制喪服王薨諡智證諡法始此子法興王立頒律令制百官公服稱
年號曰建元歷真興真智至真平王無子女善德王立遣子弟於唐請入國學善德薨
真德王立真平母弟國飯女始倣唐制為官服遣使告破百濟王自製太平頌織錦文
以獻高宗嘉之始行中國年號真德薨太宗武烈王立真智孫與唐將蘇定方共滅百
濟武烈王薨子文武王立令婦人服中國衣裳與唐兵共滅高句麗頒曆法鑄百司州
郡印文武王薨子神文王立遣使入唐請禮典并詞章則天后令寫吉凶要禮採文詞
涉於規誡者勒成五十卷賜之自神文歷孝昭王至聖德王始造漏刻歷孝成景德惠
恭宣德至元聖王定讀書出身法自元聖歷昭聖哀莊憲德興德僖康閔哀神武文聖
憲安景文憲康定康真聖孝恭至敬順王以國讓高麗王子以為不可王曰寡人孤危
勢不能全使無辜之民肝腦塗地吾不忍也乃遣侍郎金封休上書稱臣國遂絕金氏
歷三十八世凡五百八十七年蓋承二氏創守之後享國最長其禮樂文物自此稍稍
起矣自新羅始通唐時中國史官之法立已久矣而東方僻陋無文章其事多不傳高
麗金富軾撰羅史其書略具而學者不專治東史又其板本久而刓毁行于世者幾稀
君子甚懼焉公撤之按嶺南也叅奉金成杰自慶州來謁請雞林紀蹟之文善哉其推
本而慮遠也地固可傳也而事有大於地者鳥可以不書也孔子生於周而曰丘殷人
也自以微子之後也又曰夏禮吾能言之杞不足微也殷禮吾能言之宋不足徵也文
獻不足故也今金氏之散在四方者母慮千百家而皆以新羅為祖與孔子之於殷無
異也豈可言夏殷之禮而杞宋之文獻不足徵也後有善讀此碑者庶幾取以補史之
闕也銘曰
菀彼雞林興王之基孰敢不敬我銘在碑維羅有都曰彼東京鳳捿紫王汶水流清球
琳琅玕有魴有鯉其服尚素彼都人士有女鬈髮北其䯻分厥俗朴厚禮尚拜稽婚姻
之好維酒與食君子攸居樂國樂國維嶽降神生崔及薛暨暨角干用張我伐既文既
武四方為憲人文肇闢才彥滾滾朴始厚基昔又强幹暨稱新羅文質彬焕厥初之生
誕于雞林金毓以衍式至于今何德之厚何祿之長本支百世俾熾昌銘採風謠文以
記事方伯之職子孫之思
嘉義大夫慶尚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
大丘都護府使奎章閣直提學知製教 南公撤撰
通政大夫慶州府尹兼慶州鎮兵馬節制使 崔獻重書
계림유허비명(雞林遺墟碑銘) <幷序>
신라에 사기(史記)가 없다고 하나 사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
들이 읽지 않기 때문이다.
신라는 박 석 金 三성이 전해 오면서 나라를 이어옴이 千년이나 되었다.
계림은 알지(閼智)의 탄생한 곳으로 지금은 영남의 경주부에 속해 있고
세상의 김씨 된 자는 모두 알지로 시조를삼고 있다.
동국 사람들이 지금토록 그 곳은 전해오면서 그 세차(世次)와 연혁이
사기에 실려 있는 것들을 더러 자세히 모르고 있으므로 이제비명에 대략
기록하기로 한다.
처음 탈해 때에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소리를 듣고 가서 금독(金櫝)을
얻어서 열어보니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왕이 거두어 기르면서 이름은 알지라 부르고 김씨(金氏)로 사성(賜姓)
하였으며 그 숲을 계림(雞林)이라 고쳐 불렀다.
알지의 七세손 미추(味鄒)가 조분왕(助賁王 : 석씨)의 딸을 맞았는데
왕이 아들이 없자 미추(味鄒)가이어 서서 이사금(尼師今)이라 불렀다.
미추로부터 내물(奈勿), 실성(實聖)을 거쳐 눌지(訥祗)에 이르니 마립간
(麻立干)이라 부르고 백성에게 소를 길들여 수레를 끌도록 가르쳤다.
눌지가 훙(薨)하니 아들 자비(慈悲)가 서고 자비가 훙하니 아들 소지
(炤知)가 서서 처음으로 시장(市場)을 열어 사방의 재화(財貨)를 유통케
하였다.
소지가 흉하니 아들 지증(智證)이 서서 사람들의 ①순장(殉葬)을 금하고
주군(州郡)에 권농(勸農)을 명령하였으며 소로 발갈이를 시작하고 국호를
신라라 고쳤으며 방언(方言)인 이사금과 마립간을 고쳐 왕이라 칭하고
상복(喪服)을 제정하였다.
왕이 훙(薨)하니 지증이라 시호를 올리니 시법(諸法)이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아들 법흥왕(法興王)이 즉위하여 율령(律令)을 반포(流布)하고 백관의 공복(公服)을
만들었으며 연호(年號)를 건원(建元)이라 하였다.
진흥(眞興), 진지(眞智)를 거쳐 진평왕(眞平王)에 이르러 아들이 없자 딸인 선덕왕
(善德王)이 서고 자제(子弟)들을 당나라에 보내어 국학(國學)에 들어가 배우도록
하였다.
선덕이 훙(薨)하매 진덕왕(眞德王)이서니 진평왕의 동모제(同母弟) 국반(國飯)의
딸이다.
처음으로 당체(唐制)를 모방하여 관복을 만들고 사신을 보내어 백제 파할 것을
고할제 왕이 스스로 태평송(太平頌)을 지어 비단(緋緞)에 싸서 보내니 당나라 고종
(高宗)이 가상히 여겼으며 중국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다.
진덕이 훙하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서니 진지(眞智)의 손자이다.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 으로 더불어 백제를 멸하였다.
무열왕이 훙하니 아들 문무왕(文武王)이 즉위하여 부인들도 중국의 의상을 입게
하였고 당병(唐兵)과 더불어 고구려를 멸하였으며 역법(曆法)을 반포하고 백사(百司) 와
주군(州郡)의 인장을 주조 (鑄造)하였다.
문무왕이 흉하니 아들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하여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예전(禮典)과
사장(詞章)을 청하니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길흉요례(吉凶要禮)를 필사하고 규계(規誡)에
관련이 있는 것들을 골라 엄중히 五十권을 작성하여 보내 왔다.
신문으로부터 효소왕(孝昭王)을 거쳐 성덕왕(聖王)에 이르러 처음으로 누각(漏刻: 물시계)을
만들었고 효성(孝誠), 경덕(景德), 헤공(思恭), 선덕(宣德)을지나 원성왕(元聖王)에 이르러
독서출신법(讀書出身法)을 정하였으며, 원성으로부터 소성(品聖), 애장(哀莊), 헌덕(憲德),
흥덕(興德), 희강(僖康), 민애( 閑良), 신무(神武), 문성(文里), 헌안(憲安)﹐ 경문(景文),
헌강(憲康), 정강(定康), 진성(眞聖), 효공(孝恭)을 거쳐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나라를
고려에게 양여하려 하자 왕자가 불가함을 말하매 왕이 이르기를 과인(寡人)이 고위(狐危)
하여 형세가 온전하지 못할 것이니 무고(無辜)한 백성으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함은
내가 차마 못한다.
하시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竹)를 보내어 상서청신(上書稱臣)을 하니나라가 드디어
끊어졌다.
김씨는 三十八王이 五百八十七년을 누렸으니 두 성씨()의 창수(創守:창업(創業)과
수성(守成))의 뒤를 이어 나라를 가장 오래도록 누리면서 예악과 문물이 이때부터 차차
일어나게 되었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당나라와 통하였으니 그때에 중국에서는 사관(史官)의 제도가 선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동방은 벽루(僻陋:문화가 뒤떨어진 곳) 하고 문장이 없었기에 모든
일들이 많이 전하지 못하였고 고려 때 김부식(金富軾)이 신라사(新羅史)를 찬술하였으나
대략만을 간추렸고 그나마 학자들이 동국사기는힘써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 그 판본
(板本)이 오래 되어 낡고 부서져 세상에 행해진 책이 얼마 되지 않으니 군자 된 자
심히 걱정스러워하였다.
공철(公轍:찬자 자신)이 영남을 안찰할 때 참봉 김성걸이 경주에서 찾아와 계림의 기적
(記蹟) 하는 글을 청하니 그 근본을 추구하고 훗날을 염려함이 갸륵하다.
그 고장도 전하여져야 하지만 일도 땅보다 소중한 바가 있는데어찌 적지 않을 수 있으랴,
공자는 주(周)나라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나는 은(殷)나라 사람이라” 하고 스스로 미자
(微子:은의 말왕 주(紂)의 서형(庶兄))의 후손이라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하례(夏禮)를 내가
말할 수 있으나 송(宋:미자의 나라) 나라를 증거대지 못하니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의 제도가 송으로 전해졌기에 한 말)고 말하였으니 이제 김씨의 사방에 산재한 수가
千여호가 넘지만 다 신라로 조종을 삼으니 공자에 있어서 은나라와 다를 바가 없다.
어찌 하(夏), 은(殷)의 예를 말하려는데 기송(起宋)의 문헌을 장신(微信) 하지 못한다
말하겠는가?
후일 이 비문을 착실히 읽은 자 있다면 아마 간추려 역사의 부족한 점을 보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명(銘)하여 가로되
울창한 저 계림은 흥왕의 터전이라 뉘가 감히 불경(不敬)하랴,
나의 명이 비에 있다.
신라의 옛 서울은 동경(東京)이라 일컬었다.
자옥산(紫玉山)에 봉황(鳳凰) 놀고 문천(汶川)
물이 맑게 흘러 뛰어난 영재(球琳琅玕(구림낭간)) 들은 ②방(魴)도 있고 ③이(鯉)도 있다.
흰 복색을 숭상하니 저 서울의 인사였다.
여인들의 귀밑터럭 머리뒤쪽 낭자 얹네
그 풍속이 순박하여 배제례(拜稽禮 :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함)를 숭상했다.
혼인의 좋은 점은 주식잔치 베풀었고 군자가 삶을 누린 즐거운 나라였네
산악에 신이 내려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이 났도다.
용감한 김각간(金角干: 김유신(金庾信))은 여제(麗濟) 정벌 확장했네.
문과 무를 겸전하니 사방에 법이 되다.
인물문화 일찍 열어 착한 선비 왕성했네.
박씨 터전 튼튼하고 석씨 줄기 굳세었다
신라라고 일컬으니 문물이 빛이 나네
최초에 나신 이는 계림에 탄강이라
김씨가 물어 남은 지금에 이르렀다.
얼마나 덕이 두터웠으며 얼마나 녹이 길었던가?
뿌리가지 一百대에 왕성하고 번창하다.
풍속노래 명을 짓고 사실사적 서문 쓰니 방백(方伯: 관찰사) 직책이오.
후손들의 사모(思慕)여라.
주(註)
순장(殉葬) : 임금 또는 귀족의 장사에 오를 추종하던 사람을 죽은 이의 옆에 같이 묻던 일
②방(魴) : 방어의 꼬리는 원래 흰 것인데 붉어진 것은 백성의 노고가 심한 까닭으로서
주(周)나라에서는 백관(百官)에게 선정(善政) 베풀기를 권하였음.
신라에서도 주 나라와같이 선정을 베푸는 백관이 많이 있었다는 말
③이(鯉) : 공자의 아들, (鯉)가 뜰로 지나가는 것을 공자가 불러 시(詩)와 예(禮)를 배워야
한다고하였다.
신라에서도 공자의 아들 이와 같이 문예를 배운 선비가 많이 있었다는 말
가의대부 경상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 규장각 직제학 지제교
남공철 찬
(嘉義大夫 慶尚道 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大丘都護府使 奎章開 直提學 知製教
南公撤 撰)
통정대부 경주부윤 겸 경주진 병마절제사 최헌중 서
(通政大夫 慶州府尹兼 慶州鎮 兵馬節制使 崔憲重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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