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序文
代繩以來 載籍極博 一經秦火 而遺書亦能 裒聚隆替?蹟 瞭然在目中 儘人文之宣朗也
泊于東土 雖壤地褊小 代有國史 郡有邑誌 至列聖朝陵寝 靡不有誌 未知西京之檀君箕子兩殿
亦必有誌 而遠未及見 是可恨也 惟我慶州 即羅代三王相禪之舊都也 自朝家 誕擧典禮 朴昔金
三王之殿 鼎足而峙 祝册牲幣 奉命報祀 俾伸雲仍之誠 寔昭代盛擧也 金火迭遷 文獻己紊
凡為後承者 孰不欲思補先蹟哉 頃年朴氏僉員 裒輯崇德殿誌 家家珍藏焉 今為崇惠殿裔孫者
念其祖王之傳世卜年 最為久遠 而不圖所以不朽 則豈大寶禪讓殿廟隣近之觀瞻哉 本裔金學
錄為是之懼 編纂殿誌一册 以不佞 為羅朝遺民 責一言於卷瑞於乎基報本追遠之意 斯為至矣
其興廢之蹟 褒崇之典 具載誌中 不必覼縷架疊 只道基所以為誌之顛末 以贊基孝思之永言云爾
歲玄黓涒灘長至節 通仕郎權知承文院副正字 沙梁后人 崔欽弼 謹序
구서문(舊序文)
유사이래(有史以來)로 서적이 지극히 많아 한번 진화(秦火)를 겪은 후에도 남은 서적을
또한 모을 수 있어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지나간 자취가 요연(瞭然)히 눈 가운데 있었으니
참으로 인류의 문화는 밝은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강토가 비록 작으나 대대로 국사가 있었고 고을에는 읍지(邑誌)가
있었으며 열성조(列聖朝 : 역대의 조정)의 능소(陵所)에 이르러서도 능지(陵誌)가 없는 곳이
없다.
알지 못하건데 평양(平壤)의 단군전(檀君殿)과 기자전(箕子殿)에도 또한 반드시 전지(殿誌)가
있을 것이나 오래 되어 참고할 길이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오직 우리 경주(慶州)는 곧 신라시대(新羅時代) 박·석·금(朴普金) 삼왕(三王)이 서로
양위(讓位)한 옛 도읍(都邑)이다.
조가(朝家)로부터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박·석·금 삼왕의 전당(殿堂)이 정족(鼎足)과 같이
대치(對峙)하였고 축책(祝冊)과 생폐(牲幣) 희생(犧性)과 폐백(幣帛)으로서 왕명을 받들어
제향을 올려 후손의 정성을 펴게했으니 이는 밝은 세대의 거룩한 행사이다.
그러나 세대가 흘러가고 문헌(文獻)이 산일(散佚)되었으니 무릇 후손된 자는 누가 선조의
자취를 보충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연전에 박씨의 여러 종족들이 승덕전지(崇德殿誌)를 발간하여 집집마다 소중히 간직하였다.
이제 승혜전(崇惠殿)의 후손된 자는 선조 왕께서 역년(歷年)이 가장 오래되었음을 생각하고
그 유적(遺蹟)이 민몰(泯沒)되지 않을 것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어찌 내보(大寶)를 선양(禪讓)
하고 전묘(殿廟)와 이웃에 있는 보람이 되겠는가?
본손 김학수(金學銖)가 이를 염려하여 전지 일책을 편집하고 불초(不肖)한 나로서 신라의
유민(遺民)이라 하여 권단(卷端)에 서문 한 마디를 요청했으니, 아! 그 근본에 보답하고
원조(遠祖)를 추모(追慕)하는 정성이이에 지극하였다.
그 흥폐(興廢)의 자취와 포숭(褒崇)의 은전(恩典)은 지문(誌文)가운데 소상히 실려 있으니
거듭 자세히 진술(陳述)할 필요가 없기에 다만 전지를 발간하게 된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그 효성의 거룩함을 찬양(讚揚)하는 바이다.
임신년 동지절(冬至節)에 통사랑(通仕郞)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사량후인(沙后人) 최현필(崔鉉弼)은 삼가 서문을 쓰다
주(註)
秦火 : 진시황(秦始皇)의 전제정치(專制政治)를 유생(儒生)들이 비평(批評)하매 이를 미워하여
시서(詩書)를 불사르고 유생들을 죽여 가혹한 폭정(暴政)을 자행(惡行)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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