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崇惠殿

계림비각상량문(雞林碑閣上樑文)

云石 2020. 5. 9. 16:59

雞林碑閣上樑文
生員崔南復


鬱佳氣於空林千載說雞鳴之蹟立表石於遺址一朝見翬飛之休寔出 雲仍追遠
之誠亦為風流懷古之感恭惟始林靈異之著在昔閼智誕降之時翰音登天撓樹凄
凄風雨起金色暎櫝載路喤喤時夜深同蘿井馬跪之徵其生也不以人道在石函鵲
噪之後以時則又何神奇商郊鳦祺是為興王之始周氷鳥覆實由生民厥初逮至七
世孫味鄉尼師奄有百餘年新羅宗社承朴昔揖讓之位殆同虞夏相傳慕檀箕朝覲
之忧歷事漢唐無替闡人文而開物大樸消瀜定國號而稱王中葉炳朗言其教化之
漸作鑄郡印開市肆勸農耕及夫典章之益明制公服頒律今傳曆學猗歟一都之最
盛為三國之雄山川鐘清淑之精滾滾英才碩輔物華多瑰奇之產往往神器寶藏嗟
夫天理之盈虧其奈國勢之孤弱青松鵠嶺堪涕學士之書丹霞鶴簫未挽王子之馭
擧目見山河之異志士揮而回頭聽麥秀之歌遺民於悒睠彼金雞林藪之廢尤切銅
駝荊棘之歎古槐稀踈但傳新豐園里祥雲散盡何處有邰室家起行人指點之悲掛
櫝樹老寓後孫瞻慕之思剪刀石存當此為麗不億之辰那堪興廢有數之盛蔚然餘
慶聿睹翟褘簪纓之毓祥於乎不忘況復狐邱桑梓之寄思乃就千年舊地爱立三尺
短碑南刺使之山斗文名漢史得體崔明府之彛鼎書法晉帖傳神備載龍興肇基之
由一片堪語聊寓獺報窮源之志百世可親遺墟其可廢乎是皆好古曠感之致此石
所以識也莫非敦禮尚德之風留作桑海不轉之資更謀霖雨大庇之擧苔蝕蝌蚪復
恐古文獻無徵藻煥翼翬於焉新制度有作助東都風景之美畫甍林間留南天光燄
之奇丹籒石上追思衛賢之過闕孰不下車便同周家之封閭人皆折磬為興善頌式
播遠猷抛樑東雞唱桃都瑞曰紅開物寅方從此始吐含山下奠基拱拋樑南蘿井松
杉滴翠嵐揖讓醇醪風俗古千年一國姓傳三拋樑西悵望金山夕照低澆酒角干墳
上土斷碑無字草萋萋拋樑北神州萬里雲烟黑太平頌絕恨猶傳村女爭唱文錦織
抛樑上瞻星臺屹三千丈靡常天命德惟監何曰氣祥遙觀象拋樑下林下蕭蕭黃葉
打石面剪刀痕猶存子孫千萬昌而嘏伏願林樾茂美風烟蕭灑竹陵清曉時聞靈馬
之嘶風桃岑靜宵或傳仙樂之降月福祿幷湊可驗源遠則流長本支式蕃始知根深
而枝達感聖朝崇報之典豈無神理之騭陰為明時需用之材佇見地靈之鐘傑可謂
千載勝事留作一府繁華



계림비각상량문(雞林碑閣上樑文)

생원(生員) 최남복(崔南復)


가기(佳氣)가 공림(空林)에 엉켜 있으니 천재(千載)도록 닭이 을었던
사적을 말하고 표석을 유지(遺址)에 세우니 일조(一朝)에 휘비(翬飛) 의
아름다움을 보겠다. 이는 후손들의 추원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나,
풍류(風流) 선비의 회고하는 느낌도 된다.
시림(始林)에 영이(靈異)가 나타난 것은, 옛날 알지(閼智)가 탄강한 때이다.
닭소리 드높으니 나무마다 처처(凄凄)하게 풍우는 일고 금빛이 궤에 비치니
거리마다 아이 우는 소리 떠들썩하였는데 야심(夜深)한 때였다.
나정(蘿井)에 말이 무릎을 꿇은 것은 그 탄생이 인도(人道)로 이루어짐이
아니오. (박혁거세 탄생신화) 석함(石函)에 까치가 울었던 일도 어찌 그리
신기한가? (석탈해 탄생신화)
상교(商郊)에서 을매(鳦禖) 지낼 때 제비의 알은 흥왕(興王)의 시초요.
얼음위에서 새들이 덮어준 것은 실로 생민(生民)의 시작이다.
칠세손(七世孫)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에 이르러서는 백 여 년 신라의
종사(宗社)가 있었다.
박(朴) · 석(昔)의 읍양(揖讓)하는 자리를 이었으니 자못 우(虞) 하(夏:순舜과
우禹))의 상전(相傳)같고, 단(檀), 기(箕)의 조근(朝覲 : 제후가 천자를 배알함에
봄에는 조라하고 가을에는 근이라 함)한 정성을 따랐으니 한 당(漢唐)을
변함없이 섬겼다. 인문(人文)을 천양(闡揚)하고 물질을 개발하니 질박한 것이
사라지고, 국호를 정하고 왕제(王制)를 정돈하니 중엽(中葉) 부터는 빛이 났다.
교화(敎化)의 진척(進陟)을 말하자면 군인(郡印)을 주조(鑄造) 하고 시장을 개
설하고 농경(農耕)을 권장하였으며, 전장(典章)의 정비(整備)를 말하자면 공복
(公服)을 제정하고 율령(律令)을 반포(頒布)하고 역학(曆學)을 도입하였다.
장하도다! 서울의 번창은 三국에서 으뜸이었다.
산천은 청숙(淸淑)한 정기가 뭉쳤으니 왕성한 영재(英才)가 석보(碩輔)하였고
물화(物華)는 옥돌 기이한 소요(所産)이 많았으니 왕왕(往往) 신기( 神器)가
보장(寶藏)되었다.
슬프다 천리(天理)는 영휴(盈虧)가 있거니와 국세(國勢)의 고약(孤弱)하여짐을
어찌하리 곡령(鵠嶺)에 솔은 푸른데 학사(최치원崔致遠)의 글은 눈물겨웁고,
단하(丹霞) 속에 학의 통소(洞簫)는 왕자(마의태자(麻衣太子))의 말고삐를 붙잡지
못하는 구나.
눈을 들어 산하(山河)가 달라짐을 보고 지사(志士)는 눈물짓고 고개 돌려 맥수가
(麥秀歌)를 듣고 유민(遺民)은 울먹이네.
저 금계(金雞)울던 숲이 황폐함을 보니 더욱 동타(銅駝) 형극지탄(型棘之歎)이
간절하다.
고괴(古槐)는 희소(稀疏) 한데 다만 신풍원리(新豊園里)만 전해지고, 상운(祥雲)은
흩어졌는데 어느 곳이 유태씨(有邰氏:강원(姜嫄의 친정집)의 집이런가, 행인들이
지점(指點)하며 슬픔을 일으킨 것은 금독(金櫝)을 얹었던 나무가 늙었기 때문이오,
후손들이 모(瞻慕)하는 생각을 갖는 것은 태(胎) 가리던 칼 흔적이 돌에 남았기
때문이다. 그 자손이 수없이 많은 때를 당하여﹐ 어떻게 흥폐(興廢)가 기수(氣數)
있음을 견디랴? 울연(蔚然)한 여경(餘慶)은 적위(翟偉:붉은비단에 꿩을 수놓은 제복
왕비를 말함) 와 잠영(簪纓:벼슬아치)의 성한 상서를 보거니와 모든 것을 잊기
어렵지만 하물며 ⑤호구(孤邱) 상재(上梓)의 생각이랴!
이에 천년의 옛터에 삼척(三尺)의 단비(短碑)를 세웠다.
남자사(南刺使:경상도 관찰사 남공철을 말함)의 산두(山斗: 태산(太山) 북두(北斗)
훌륭한 문장을 비유함) 문장은 한(漢) 나라 사마천(司馬遷)의 한사(漢史) 편찬한
솜씨를 얻었고 최명부(崔明府:경주 부윤최헌중을 말함)의 이정(彛鼎) 서법(書法)은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신필(神筆)을 전해 받았다.
용흥(龍興:왕조를 일으킴) 조기(肇基)의 사유를 자세히 실었으니 일편석(一片石)이
말하여 줄 것이요, ⑧달보(獺報) 궁원(窮源)의 뜻을 붙였으니 백세도록 친목할 것이다.
유허(遺墟)를 버릴 수야 있겠는가. 이것은 모두 호고(好古) 광감(曠感)의 소치(所致)인
것이오. 이 돌은 가히 새길 만하니 돈례(敦禮) 상덕(尚德)의 풍조 아님이 없도다.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어도 변하지 않을 것을 만들어 두었고, 장맛비에도
가릴 수 있는 길을 꾀하였다.
과두(蝌蚪:글자모양이 올챙이와 같음)에 이끼 끼고 일그러지면 고문헌(古文獻)이
없어질까 다시 적정이 되고 날렵하고 아름다운 집을 지으니 신제도(新制度)가
마련됨이라.
동도(東都)의 풍경 아름다움을 도우니 임간(林間)의 청기와 집이오, 남방(南方)에
경관(景觀) 기특함을 남겼으니 석상(石上)의 붉은 전자 글씨라, 위현(衛賢)의
궐문(闕門) 지나던 일을 생각하면 뉘라서 수레에서 내리지 않을 것이며, 주가(周家)의
봉려(封閭)와 흡사(恰似)하니 저마다 절경(折磬)을 하는구나.
좋은 송사(領詞) 불러 널리 알리고자 한다.
동쪽 들보 올리니, 선도산(仙桃山) 서울에 닭이 우니 서일(瑞日)이 붉도다.
동방에 문들이 열림이 이때부터 비롯하였으니,
토함산 아래에 새 터전 마련하였네.
남쪽 들보 올리니,
나정(蘿井)의 송삼(松杉)은 푸른 아지랑이에 젖어 있네.
읍양하는 풍속은 순요(醇醪)처럼 순박한데,
천년의 한 나라를 세성(三姓)이 전하였네.
서쪽 들보 올리니,
저 멀리 금산(金山)에 저녁 빛이 지는구나.
각간(角干)의 무덤 위에 글을 뿌리니,
동강난 빗돌에는 글씨도 없이 풀만 무성하여라.
북쪽 들보 올리니,
신주(神州:중국을 말함) 만리(萬里)에 운연(雲烟)만이 검구나.
태평송(太平頌)은 끊기고 한(恨)만이 전해오니,
촌녀(村女)들은 다투어 비단 짜던 글을 노래하네.
위쪽 들도 올리니,
첨성대는 삼천장(三千丈)이나 높았구나.
천명(天命)은 떳떳치 않는 법 덕만이 소중한데,
어느 날에나 좋은 일 있으려나 멀리 천상(天象)만을 보노라.
아래쪽 들보 올리니,
숲속에 소소(簫簫)히 황엽만이 떨어지네.
석면(石面)에 태 가리던 칼흔적 아직도 남았는데,
자손은 천만이라 대창(大昌)도 하여라.
엎드려 바라건대 임월(林樾:숲)은 무미(茂美)하고 풍연(風烟)은 소쇄(簫灑)하여,
죽릉(竹陵)의 청효(晴曉)에는 영마(靈馬)의 을음소리 들리고,
도잠(挑岑)의 정소(靜宵)에는 선녀의 풍악소리가 들리게 하며,
복록(福祿)이 함께 하여 근원이 멀면 흐름이 길다는 것을 증험케 하고,
본손(本孫) 지손(支孫) 번창하여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함을 알게 하소서.
성조(聖朝)의 숭보(崇報)하는 예절에 감사하고 있을지니 어찌 신도(神道)의
음즐(陰騭:보이지 않게 도움)이 없을 수 있으리 밝은 세상에 쓰일 인재를 위하여
지령(地靈)이 호걸을 배출하여 줄 것을 기다려 보자.
가위 천재(千載)의 승사(勝事)요, 일부(一府)의 번화(繁華)를 이룩함이라.

주(註)
상교을매(商郊鳦禖) : 옛날 제곡 고신씨(帝嚳 高辛氏)는 네 사람의 비(妃)를 두었다.
첫째는 유태씨(有邰氏)의 딸로 이름은 강원(姜嫄)이요.
둘째는 유융씨(宥娀氏)의 딸로 이름은 간적(簡狄)이요.
셋째는 진봉씨(陳鋒氏)의 딸로 이름은 경도(慶都)요 넷째는 취자씨(娶呰氏)의 딸로 이름
은 상의(常儀)였다.
그리하여 각기 아들 하나씩을 두었는데 첫째는 후직(后稷)을 낳고, 둘째는설(楔)을 낳고,
셋째는 요(蕘)를 낳고, 넷째는 지(摯)를 낳았다.
둘째 간적이 아들을 얻으려고 고매(高禖:아들을 빌던 장소 이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제비가 날아와서 알 하나를 떨어뜨렸다. 간적이 그 알을 먹고 태기(胎氣)가
있어 설을 낳게 되었다 한다.
설은 순임금의 사도 (司徒)가 되었는데 그의 후손이 탕(湯)으로 상(商)나라를 세웠으니
설은 상의 시조이다.

②주빙조복(周氷鳥覆) : 제곡의 첫째 비 강원이 역시 아들을 빌고 있는데 대인(大人:제상)의
발자국이 있어 그 발자국을 밟고 따라가니 흔흔하게 인도(人道)의 감각이 있어 끝진 곳에
이르니 몸이 몹시 진동(震動)함을 느끼고 드디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제곡이 인도(人道)로 낳지 아니하였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골목에다 버리니 소와 양이
가려주고 있기에 숲속에 다 버리니 마침 여러 사람이 숲을 베어 버렸다.
다시 얼음을 위에다 갖다버리니 새들이 모여들어 날개로 감싸주고 있었다.
그제야 이상히 여겨 다시 거두어 길렀다 한다.
그리하여 이름은 기(棄)라 하였는데 순의 후직이 되었다.
주(周)나라는 그의 후손이니, 후직은 주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동타형극지탄(銅駝型棘之歎) : 후한시대에 낙양(洛陽)의 중양문(中陽門) 밖에 동으로 낙타(
駱駝) 두 마리를 만들어 상대하여 세웠는데 각각 길이가 한길(一丈) 높이가 한길이었다.
그리하여 이 거리를 낙타가(駱駝街)라 하였는데 그후 서진(西晋) 때에 색정(索靖)이란 사람이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 세상이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그 거리를 지나면서 낙타를
“얼마 안가서 네가 가시밭 속에 있게 됨을 볼 것이다”. 하였는데 그 후 진은 북위(北韓)에게
쫓기어 강남(江南)으로 옮기고 낙양은 폐허가 되었다.

신풍원리(新豊園里) :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천하를 얻고 장안(長安)에 도읍을 하였는데
그의 아버지 대상황(太上皇)이 늘 옛 고향인 풍패를 못 잊어 하였다.
그리하여 유방이 장안 곁에 성시(城市)와 거리를 풍과 똑같이 만들고 풍 땅에 사는 주민들까지
옮겨왔는데 이곳을 신풍원리라 불렀다.

⑤호구(狐邱) : 여우는 죽을 때에 반드시 언덕(굴이 있는) 쪽으로 머리를 두고 즉는다고 한다.
이것을 수수(首丘)라 하는데 예기(禮記)에 수구는 인(仁)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집이나 고향을 그리워하는데 쓰인다. 근본을 잊어버리지 않는 마음을 수구초심
(首丘初心)이라 말한다.

상재(桑梓) : 시경(詩經)에 뽕나무나 가래나무만 보아도 반드시 공경할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어떤 것은 부모가 심은 나무가 아니냐 한 데서 온 말로 옛사람들은 집 주위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또 가산으로 아들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에 부모를 추모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하는데 많이 인용되어 왔다.

이정(彛鼎) : 이(彛)는 이준(彛樽)으로 종묘(宗廟)의 술그릇이요﹐ 정(鼎)은 국정(九鼎)처럼
나라의 상징(象徵)이 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나 정에는 거의 명(銘)을 새겼는데 그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 다 함

달보(獺報) : 수달피는 고기를 잡아 오면 늘어놓는 습성이 있는데 고인들은 수달피가
제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줄 알고 달제(獺祭)라 하였고 수달피는 보본(報本)을 할 줄 안다
하였다. 그리하여 조상을 추모함에 비유되었다.
달제는 또 책이나 물건을 늘어놓고 상고하는 데에도 쓰임.

위현(衛賢) : 춘추시대 위나라의 대부(大夫) 거백옥(籧伯玉)을 가리킴.
백옥은 궁월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서 걸어갔는데 아무리 밤중이나 급할
때에도 어김이 없어 영공(靈公)은 수레소리만 듣고도 거백옥인지 아닌지 알 정도였다.

봉려(封閭) :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의 주(紂)를 쳐서 천하를 얻은 직후 은의
충신이었던 비간(比干)의 묘를 봉축하여 주고 귀양 가 있는 상용(尙容)의 집에 표(表)를
세워주었다. 백성들은 이를 보고 서로 충절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함.

절경(折磬) : 원어는 경절(磬折)인데 봉려(封閭)와 대구(對句)를 맞추기 위하여 바꾸어 썼음.
허리를 많이 숙여 공경을 표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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